번역이란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낡은 경구처럼, 번역은 어떻게 해도 '오류'를 포함하게 되어 있고, 아무리 잘 해도 누군가의 기준에는 못 미치게 마련입니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표현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번역계의 오래된 두갈래의 길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면 정말 골치가 아파지죠. 번역이냐 의역이냐는 어떤게 정답인지 딱히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론이 안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번역자 본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을 택하는 게 정답인 게 되어 버렸죠. 물론 안정효씨 같은 분 레벨정도 되면 (이 분은 직역주의자) 원문의 문장 길이와 호흡, 쉼표까지 살리면서 우리말로 부드럽게 번역하는게 가능해지지만.....그거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거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화번역은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 전달할 수 있는 정보량 자체가 원문에 비해 줄어들죠. 자막에 익숙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 줄 꽉차는 자막이 나오면 절반도 내용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익숙한 사람이야 세줄짜리 자막이 나오고 슉슉 지나가도 충분히 흡수하지만, 대중을 위한 상업영화자막이라면 아무래도 속도가 느린 사람에게 기준을 맞춰야겠지요. 따라서 극장용 번역은 원래 대사를 축약하는 형태로 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게다가 영화의 경우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이 본다는 점을 고려하여 어휘 선택도 신중해야 합니다. 웬만하면 쉬운 어휘와 표현을 써야겠지요. 그래서 어찌 보면 활자매채 번역보다 영상매채 자막 번역이 더 어렵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어렵다는게 오역을 용서할 수 있는 핑계는 되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의 극장용 자막, 아니 DVD와 같은 2차매채용 자막까지 포함해야겠군요, 이 자막의 질은 정말 형편없습니다. 뭐 하루이틀의 이야기는 아닙니디만, 문제는 개선의 기미가 전혀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지적하는 번역의 문제는 '일반적인 대사' 에 국한됩니다. 장르특정적이거나 시리즈 특정적인 전문용어의 경우는 잘 모르는 관객을 위해 쉬운 말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물론 팬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터지는 일입니다만...)
책의 경우, 원서를 읽는 독자들이 존재하고 그런 독자들로부터 오역에 대한 지적이 빈번히 제기되며, 이러한 문제제기가 인터넷을 타고 퍼지면서 심지어 법적인 분쟁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등장하였습니다. 가뜩이나 책이 안팔리는 상황에서 오역에 대한 문제라도 터질라치면 판매량에 영향이 있다보니,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아직도 무서운 오역들이 난무하고, 심지어 판매되는 책이 누가봐도 비문인 문장에 버젓이 들어앉아 있거나, 일본어판 중역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출판사들이 남아 있긴 합니다만, 평균적인 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출판계의 번역의 질은 좋아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역에 대한 피드백도 어느 정도 존재하구요.
그러나 영화자막은 발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영상매채이며 원어가 음성을 통해 전달되다보니, 오역이 있어도 증거를 제시하기가 어렵고 100% 확신을 가지기 힘듭니다. 듣기가 능숙하신 분들은 물론 정확히 듣겠습니다만, 그래도 뭔가 확실한 원문 - 예를 들면 대본 - 이 있어야 문제 제기가 될텐데 영화는 그런걸 구하기가 힘들죠. 영문대본이 인터넷에 퍼진다고 해도 그걸 구할 수 있을 때쯤이면 대개는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온 뒤입니다.
또한 문제제기를 해도 전혀 피드백이 되지 않습니다. 영화사에서 물론 영화에 대한 반응을 모니터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번역에 대한 반응은 모니터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무시하겠죠. 원문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판단이 가능하다는 물리적인 한계로 인해 문제 제기의 빈도가 낮을 수 밖에 없고, 소수관객의 반응이므로 영화사는 그냥 간편하게 무시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시사회 때 시사회 관객이 문제제기를 직접 관계자에게 전달해도 무시되더군요.
게다가 관객들도 번역의 질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영화를 봤을 때 이게 오역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듭니다. 그 정도 수준이 되면 자막 무시하고 보겠죠. 하지만, 누군가 문제제기를 하고 정당한 근거를 댄다면 그에 대한 호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불하는 영화 관람 비용에는 분명 번역에 대한 비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번역의 경우는 영화 감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외국어를 모르는 관객이라면 자막에 의존하여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자막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전달받아야 하기에 관객은 번역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죠. 즉, 영화의 자막 역시 관객이 돈을 지불한 하나의 '상품' 또는 '서비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품의 질이 형편 없다고 누군가 지적한다면 마땅히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비록 그 영화는 이미 프린트가 나와서 자막을 수정할 수는 없을 테지만, 고객의 클레임이 계속 누적된다면 배급사는 아마 다음 영화에서는 좀 더 자막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될 겁니다. 그런데, 한국 관객들은 자막의 질에는 정말 관심이 없나 봅니다. 누군가 지적하면 '잘난 척 하지 마라' '그럴거면 니가 해라' 라는 반응을 보이거나,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팬들이나 일부 영화광들의 자막 번역 지적은 정말 지겹다. 그냥 대충 봐라' 라는 반응이 나오더라구요. (그래, 제발 내가 하게 해 줘라. 차라리 내가 하고 만다 정말.) 자신이 대가를 지불한 서비스의 질에 대한 관심이 이정도이니, 배급사 입장에서 일부 네티즌의 불평을 무시하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굳이 신경쓸 거 있나요, 몇몇 것들만 모여서 쑥덕거리는 건데.
(그나마 몇 년 전에 이** 씨가 영화 번역으로 약간의 이슈를 만들었고, 덕분에 돈도 약간 벌었습니다만, 사실 그 사람의 번역에 대해서는 말이 참 많습니다. )
거기에 더해, 구조적인 문제도 있죠.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가 한국 영화번역 시스템이 아주 엉망이라는 것인 걸 보면, 분명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겁니다. 예를 들어 들은 이야기로는 '번역자가 번역한 자막이 그대로 입혀지는게 아니고 영화배급사에서 고치는데, 거기서 아주 엉망이 된다더라', '일을 정말 촉박하게 주고 수가는 영 아니어서 다 알바 시킨다더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사실 가끔 영화를 보면, '이 영화는 3명의 알바가 작업했군' 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신줄을 놓은 상태가 아니라면, 20분 전에 A를 '아' 라고 번역한 사람이 20분 뒤에는 A를 '어'라고 번역하지는 않거든요.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 영화자막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방법은 하나, 관객의 지속적인 문제제기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돈 주는 사람이 계속해서 불평을 해 대면, 배급사들도 뭔가 생각이 달라지겠죠.
ps. 그래도 bearing 298를 '사람 298명' 으로 번역한다거나,
large radar signiture 를 '큰 레이더를 장착한' 이라고 번역한다거나
'infection을 일으키려고 주사를 놓는 것을 '백신을 놓는다' 라고 번역한다거나 (영어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화면으로만 봐도 이상함)
상급자에게 다같이 반말을 깐다거나 (심지어 대사에 sir가 들어가도)
없는 단어 집어넣기를 한다거나 (설명을 위한게 아니라 전혀 엉뚱한)
그 외에도 정말 일반적인 대사에서 수두룩하게 오역을 남기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진짜로. 내 돈 내놔 홍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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